정조는 세손으로 있을때부터 영조의 두 번째 왕비의 아버지인 김한구,
그리고 두 번째 왕비의 오빠인 김구주 등 벽파의 계략으로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를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인 홍인한 조차 세손을 모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1755년 12월에 세손으로서 대리청정을 맡았다가 두 달 후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이 많았기 때문에 세손 때부터 세자시강원 설서로서
그를 보호해 주던 홍국영을 왕의 비서인 승지로 발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홍국영에게 수어사, 총융사, 금위대장, 숙위소의 책임을 맡겨 경호를 튼튼히 하게 하고,
규장각을 설치해서 측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렇게 정조의 비호 아래 홍국영 중심의 세도정치가 시작 되었는데요.
홍국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누이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원빈이 소생 없이 죽게 되자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고, 그 이유로 결국 정조에 의해 축출됐습니다. 그
후 정조는 소론 시파를 중용하여 소론과 노론의 탕평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 기호 남인 세력을 끌어들여서 노론,소론,남인 삼당의 연립 정권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노론 벽파의 압박이 워낙 강해서 정국을 풀어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규장각에 초계문신이라는 제도를 두어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먼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수원으로 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화성 축조와 잦은 행차를 했었고,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숙위소를 개편하여 장용영을 두게 되었습니다.
장용영은 도성을 지키는 내영과 화성을 지키는 외영으로 나뉘었는데
기존의 5군영보다 규모가 큰 군영으로 이루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행위는 노론 벽파의 불안감을 고조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눈여겨 보고 있는 시기에 정조는 또 산림무용론을 내세워서 노론 정권의 이념적 기초를 무너뜨리고,
군주도통론을 내세워 자기의 말에 거스르는 사람은 금령을 내려서 제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얼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고, 하층 농민 보호를 위한 고공법정,
어용상인들의 상업독점권을 제한하는 신해통공 등 정쟁보다는 개혁 정치의 뜻을 서서히 펼치기 했습니다.
그러다 정조는 1800년 5월 말일에 갑작스럽게 교서를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교서에서 신임의리와 임오의리를 구별해 전자는 옳고 후자는 그르다는 판정을 내리되,
임오의리에 저촉된 사람들을 결코 처벌하지 않겠다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오회연교로, 노론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지 12일 만에 정조는 별안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탕평 정치는 영조, 정조와 같은 슬기롭고 총명한 국왕을 만났을 때에는
붕당과의 타협을 통해 실학과 같은 문운을 일으키고, 일시적이나마 위민정치를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어리고 무능한 왕이 들어서게 되면서 곧 척신 세도정치로 치닫게 되었는데요.
그렇게 됨으로써 견제 세력이 없는 척신들의 부패로 인해 나라가 급속도로 바르게 망하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외척 세도정치기
정조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영조의 둘째 왕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벽파 김구주의 누이였기 때문에 정권은 노론 벽파에게 돌아갔으며,
축출된 남인은 이미 재기불능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론 벽파도 정조로부터 순조의 보호를 부탁받은 김조순의 지위는 쉽게 흔들 수 없었습니다.
김조순은 김상헌의 후손으로, 많은 사림을 배출한 가문의 배경과 정조의 권위를 등에 없고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국왕인 순조의 장인으로서 전권을 휘두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조득영은 시파를 섬멸하려다 잡혀 죽은 김달순을 공격함으로써 벽파 세력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풍양 조씨 가문이 김조순의 안동 김씨 가문과 협력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순조는 풍양 조씨 가문의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김조순의 반남 박씨 가문과 풍양 조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서 벽파 세력을 제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1804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게 되었고,
이듬해 그녀가 죽음으로써 벽파들이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진 것도 벽파 정권 몰락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조 이후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계속되는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순조는 안동 김씨 세도가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친정에 나서려고 했으나 번번이 반대에 부딪혀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계에 부딪힌 순조는 안동 김씨 세력의 양해를 얻어서 1827년에 효명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하게끔 명령했습니다.
대리청정의 표면적 명분은 자신의 건강 악화와 세자에게 정치적 경륜을 쌓게 해준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 뜻을 알고 있었던 효명 세자는 그 뜻에 따라 안동 김씨 비호 세력을 몰아내었고,
반 안동 김씨 세력들을 기용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소론, 남인, 북인, 서북인의 일부도
탕평을 통한 왕권 강화를 표방하며 합류시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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