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정치기 part 2.
숙종 대에는 예론으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의 골이 깊어진 탓에 정권 교체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격렬한 정쟁이었냐면요. 목숨까지 잃게 되는 사람들이 무수히 나올 정도로 격렬했답니다.
그래서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훈척 세력으로 당파를 치거나,
이 당파로 저 당파를 치는 파행적인 방법을 쓰기 시작했어요.
즉위했던 해에 일어난 갑인환국에서 청풍 김씨인 김석주를 앞세워서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무너뜨렸고,
남인을 끌어들여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을 하고자 했었는데요.
이렇게 끌어들인 남인 세력이 점차 계속해서 커지자 1680년에는 경신환국을 통해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김석주와 송시열이 정국을 주도했는데요.
한편 남인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김석주가 일으킨 고변 사건에서
역모 조작 가담자인 김익훈을 송시열이 두둔하게 되자,
서인은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그를 비판하는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숙종 즉위 15년이 되던 해에는 숙종은 후궁 장희빈에게서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을 하고자 했는데요.
이에 대해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이 매우 격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이때의 숙종은 가뜩이나 서인의 위세가 강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노론이 자기의 뜻을 거스르자 이를 서인 타도의 기회로 이용을 했는데요.
이에 서인의 지리를 받고 잇던 인현왕후 민 씨가 폐위가 되어버렸고,
송시열이 죽임을 당하고 100여명 이상의 서인 인사들도 화를 당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게 됩니다.
경신환국에 윤휴가 죽고 기사환국에 송시열이 죽게 되면서, 남인과 서인의 종장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어버렸는데요.
이것은 이미 사림 정치의 틀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남인 인사들을 처벌하고 서인을 기용하는 갑술환국도 단행 되었는데요.
이 갑술환국 직후에는 세자의 어머니였던 장희빈과 그의 오빠인 장희재를 죽여야 된다는 노론과
이를 반대하는 소론의 대립도 한 차례 더 있었습니다.
결국 숙종은 인현왕후가 죽은 이유가 장희빈이 저주를 했기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장희빈과 장희재를 죽이게 되면서 대립의 논쟁을 끝을 맺었습니다.
숙종은 노론 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해 정국을 이끌어 갔으나 말년에는 노론으로 기울여 지게 되었는데 이 기울임으로 인해 소론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경종 즉위 후에도 노론의 집권을 계속되었는데요. 노론은 자기들의 집권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경종을 퇴위시키려는 움직이려 했었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고 있어 노론을 타도하기 위해 움직이려 했습니다.
이러한 두 세력의 충돌은 1721년 신축 환국과 1722년 임인 옥사로 나타났는데요. 이 두 사건으로 많은 노론 사림이 화를 입게 되자 이 사건을 신임사화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제 당쟁은 예송과 같은 정책 대결이나 단순한 정권 교체로 끝나는 게 아닌,
신료들이 국왕을 선택하고 거기에 충역 의리를 결부시키는 정쟁으로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탕평 정치기
당쟁은 예송 논쟁을 거치게 되면서 극단으로까지 치닫게 되었고,
그 결과 체제가 붕괴할 위험에 까지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숙종 때에는 처음으로 황극탕평론이 나오게 되었는데요.
이때 왕권을 중심으로 붕당 간의 타협을 통한 탕평 정치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1741년에 전랑권, 언론권, 한림회천권이 혁파될 때까지 사림 정치의 틀은 그대로 유지 되었습니다.
경종 때 있었던 충역의리는 이후 영조 즉위 후까지 정국을 좌우하는 노론 소론 간의 뜨거운 쟁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영조는 노론 소론 간의 첨예한 갈등을 완화 시키고,
자기의 집권 명분을 확립하기 위해서 탕평책이라는 것을 시도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영조 자신은 노론의 지지로 국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왕들과는 달리 자기를 올려준 노론을 무조건적인 두둔을 하다가는
언제 어떠한 참화를 당하지 알 수 없는 시기였기에 기지를 발휘해 양당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가 하면,
처벌할 때도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신임사화에서 받은 노론 인사들의 죄를 소론 온건파가 하나씩 풀어줌으로써,
끝에는 자신이 국왕에 오른 명분을 합리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왕권을 강화하는 마음을 먹고 실행을 했다.
그래서 영조 치세 전반기에는 소론 탕평을 실시해서 노론이 정국을 주도했고,
이조정랑과 좌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되고, 언관의 언론권이 제약을 받게 되면서
이로써 사림 정치의 틀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하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새로운 탕평당을 키우게 됨으로써 그들이 외척 권신이 되는 길을 열어놓게 되어버렸습니다.
18세기 이후 지방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이 사실상 봉쇄 된 상황에서
형성된 한양의 세도가문들은 탕평 정국에서 왕권의 보호자를 자처했습니다.
이것이 뒤에 왕권이 세도가문에 매몰되어 독자성을 잃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독자성을 잃어버려서 생긴 사건이 생겼는데요.
1762년 5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일을 임오화변이라 부르게 되는데요.
임오화변으로 인해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동정하지 않는 벽파 간의 대립으로 인해서
영조의 뒤를 이어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데에
자신의 재임 기간을 다 보내게 되는 계기도 만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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