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 정치기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뒤 본격적인 당쟁이 일어난 시기를 사림 정치기라고 불립니다.
이 시기는 명종 조 이후부터 경종 조가지 계속되는데요.
16세기에 훈신 세력은 네 번의 사화를 통해서 사림 세력의 성장을 막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 노력과는 달리 시대의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사림파의 진출을 막을 수는 없었는데요.
이조정랑, 좌랑 등의 전랑권이 강화되어서 청요직 당하관의 인사권이 관행적으로 사림파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언관의 언론권이 강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관직 세계에 새로운 바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종의 외척인 심의겸이 사림 세력을 지지하게 되었고,
새로 국왕이 된 선조는 아직 혼인하기 전이어서 외척이 없었던 틈을 타서
사림 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기회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사림파는 대적할 상대가 점점 줄어들게 되는데
그러자 본인들끼리 다투게 되는 내부 분열까지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을 많은 역사학자들은 당쟁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선조 초기 당쟁에서는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선배 사림은 심의겸 등 명종 권신 정권에서 벼슬을 한자리씩 맡았던 사람들이었고,
후배 사림들은 사림 정치가 시작이 되면서 즉 새로이 정계에 발을 들인 신진 관료들을 의미를 합니다.
대표 인물로는 이이, 김효원 등이 있었는데요. 그들은 군자 소인론을 기반으로 해서 본인들을 군자라고 칭하고,
선배 사림들을 소인이라고 부르며 공격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충돌은 1575년, 선조 즉위 8년이 되던 해에 일어나게 되었어요.
김효원이 이조정랑에게 추천된 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일을 시작으로 사림 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게 되었는데요.
이때 김효원을 편든 사람들을 동인이라 불렸고, 심의겸을 편든 사람들을 서인이라 불렸습니다.
당시는 동인의 세력이 강해 많은 사람이 동인에 가담했었는데요.
근데 동인은 정여립의 옥사를 과도하게 다루었던 서인 파 정철의 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강경파였던 북인과 온건파였던 남인으로 또 한차례 나뉘게 되었습니다.
남인 류성룡이 임진왜란 때 와 의론에 찬동한 책임을 지고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의병을 많이 일으킨 북인들이 집권을 잡고 광해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북인은 또 한 번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대북과 소북으로 갈렸는데요.
광해군 때는 대북이 조금 더 우세했었습니다.
대북이 차지하던 정권 시기에는 적자도 장자도 아닌 광해군은 왕의 정통성의 약점을 의식해서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어린 적자였던 영창대군을 죽이게끔 했습니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였던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까지 하게 만들어
본인들의 정권 강화에 힘을 실으려는 무리수까지 두게 되었는데요.
이렇게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서인들이 의기투합하여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명분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반정의 명분은 이것만이 아니었어요.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벌인 것도 같이 문제가 되었는데요.
이 외교는 명나라를 존경해 사대 외교를 해야 한다는 존명사대의 명분에 어긋났다고 여겨져서
이 이유와 같이 포함해 광해군은 결국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쫓겨남과 동시에 대북 정권 또한 같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북 정권이 크게 서인 정권에서는 이 비상시국을 이용하여 인심 수습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남인을 관제 야당으로 불러들였고, 또 서인들은 독주하다가 스스로 분열된 것을 보고
똑같이 분열되다가 소멸하지 않기 위해 소북 세력도 끌어들였는데요.
사실 이미 정권은 서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그 과정 중에서 공신 출신의 공서와 사림 출신의 청서가
또 한번 기본적인 대립 구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대립 일화로는 병자호란 때 공신들은 후금과의 친목을 다지자는 화의를 주장했지만,
사림들은 배척해야 한다며 척화를 주장했어요. 같은 서인이었지만 이 의견으로 인해
공서와 청서는 주화파와 척화파로 변화해 갈리게 되었습니다.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의 정권은 사실상 공신들에 의해 주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금에게 항복한 이후로는 후금의 눈치를 봐야 하다 보니 존명 사대의 큰 명분을 잃게 되어버려서
사림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되었어요.
또한 김장생,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호서 사림의 영향력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고,
이들의 제자들이 조정에 대거 등용이 되면서 여론에 서서히 밀리게 되면서
현실성이 희박한 북벌 정책을 밀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을 겪게 되면서 친청파였던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반청파인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고, 이 왕이 효종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올라 온 효종 대에는 국왕이 송시열의 도움을 받아 북벌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한 북벌은 의미가 달랐어요.
효종은 이를 기회로 왕권 강화를 위해 군사를 길렀고요.
송시열은 이를 이용해 사림의 정치적 기반을 단단히 하기 위해 진행을 했어요.
한마디로 북벌은 명분만 있을 뿐 현실화시킬 수 없었는데요.
그래서 이 시기에는 당쟁보다는 왕과 정권 세력과의 구도가 강했고,
그저 서인 내부에서 송시열 계열의 사림 세력과 심육을 필두로 하는 청풍 김씨 외척 세력이 살짝 경쟁하는 정도였습니다.
현종 대에 이르러서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확고하게 정권을 주도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조 이후로 성장해 온 남인 세력도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시기가 이 시기인데요. 이들 간의 권력 장악 기도는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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